1982년 12월 14일, 서울 금천구 호암산 낙엽 더미에서 꽁꽁 언 채로 한 나체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자는 이발소에서 근무하던 종업원 김모(당시 24세)씨로 밝혀졌다.
부검 결과 김씨의 위에서 청산가리가 검출됐다.
문제는 시신에서 저항한 흔적이나 외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이발소를 중심으로 손님들을 일일이 조사하기 시작했고 사진작가라는 한 단골이 김씨를 자주 찾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사진작가 이동식(당시 42세)을 찾아왔고 그는 “김씨를 안다. 단골이다”고 태연하게 답했다.
수색 결과 이동식의 집에서 죽은 김씨의 사진이 나왔고 경찰은 이동식을 용의자로 판단,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는 상태였고 이동식 또한 “모델로 기용한 뒤 사진만 찍고 헤어졌다. 김씨가 헤어진 후 스스로 독을 먹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이 때 경찰은 당시 유명 사진작가를 수사팀에 합류시킨 후 사진 분석을 의뢰했다.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일링 기법이 동원된 사건이었다.
사진작가의 분석 결과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동식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보고 전문가는 김씨의 체모가 서서히 눕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사후에는 인체의 털이 서서히 경직되며 눕게 된다.
1번부터 16번 사진까지 김씨는 살아 있었지만 이후 사진은 숨진 상태였다.
이동식이 김씨에게 청산가리를 먹인 뒤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었고, 살인범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이는 1980년대 전 국민을 경악하게 했던 ‘죽음 연출 사건’으로 한 사진작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다.
이동식이 사진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첫 작품은 닭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진을 찍는 작가’라는 평가를 얻으며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게 된다.
이후 이동식은 줄곧 죽음에 집착했고 시신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촬영하다 마침내 자신이 직접 살인을 계획하기에 이른 것이다.
1982년 11월, 이동식은 친분을 쌓은 김씨에게 “산에게 찍는 작품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뒤 김씨에게 날이 추우니 감기약을 먹어 두라며 청산가리를 담은 캡슐을 건넸다.
산에 오르기 전 이동식이 약국에 방문하는 모습을 봤던 김씨는 별 의심 없이 이를 받아먹었고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동식은 김씨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21장에 걸쳐 연속해 촬영했으며, 김씨가 숨이 끊어진 뒤에도 팔을 묶고 옷을 벗겨 누드 촬영까지 감행했다.
이동식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항소,상고를 거듭했으나 기각당하고 1984년 2월 16일 사형을 확정받았다.
이후 1986년 5월, 서울구치소에서 이동식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는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이 죽어가는 모습, 그것은 예술이다. 나는 예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런 것을 늘 동경해 왔다”